베네수엘라에서 내 이름은 호세이다. 명함에도 ‘서 호세’로 되어 있다. 외국인에게
우리 이름이 얼마나 발음하기 힘들겠는가. 그래서 고객 배려의 차원에서, 그리고 현지인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서, 나는 근무지마다 현지 이름을
붙이곤 했다. 호세는 중남미에서 아주 흔하고 조금 촌스러운 이름이다. 그래서 친근감이 더 있는 듯하다. 처음 만나는 현지 사람에게 호세라고
소개를 하고 명함을 건네면 무척 신기해하고 또 좋아한다. 같은 사람을 두번째 만나면 거의 예외 없이 내 이름을 기억해서 ‘세뇰 호세’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하고, 여기 식으로 양 볼에 키스를 하기도 한다.
차베스 대통령이 외교단을 위한 신년하례회를 한다 하여 부재중인 대사를 대리하여 참석한 적이 있다. 한국대사관 호명이 있은 후, 대통령과 악수를 하면서 “호세입니다” 했더니 대통령의 눈이 똥그래졌다. 내친 김에 “베네수엘라 사람입니다” 했더니 눈이 더 똥그래졌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마음으로”라고 덧붙이니까 차베스 대통령은 박장대소를 하더니 나를 얼싸안고 등을 두드리면서 “고맙소, 고맙소”를 연발했다.
내가 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미사여구를 써서 마음에 없는 빈말을 하면 상대방도 빈말인 줄 금방 안다. 술수를 쓰면 술수인 줄 금방 안다. 나는 선량하고, 느긋하고, 돈이 없어도 즐겁게 사는 베네수엘라인들, 특히 서민들을 사랑한다. 베네수엘라와 한국은 상호보완의 여지가 크다. 미력이나마 교류확대를 통해 관계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남은 해외근무를 몽땅 베네수엘라에서 하면서 인간관계도 넓히고 긴 안목에서 외교를 해보고 싶은 것이 소망인데, 이 얘길 하면 이 나라 사람들은 더욱 좋아한다. 베네수엘라가 외국 외교관들이 선호하는 곳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의 외교관상(像)은 총 안든 전쟁을 수행하는 ‘냉혈한’이었다. 그러나 이런 외교관은 오늘날에는 왕따 밖에 될 게 없다. 나의 전임지인 필리핀에서 큰 신문사 사장 겸 편집국장이 대문짝만한 사설을 통해 유럽의 모 강대국 대사를 거만하고, 필리핀인들을 깔보는 냉혈한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적이 있다. 그 대사가 반박 겸 변명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나라 여기서 10년 외교 헛 했네”라는 얘기까지 돌았다. 이상하다. 말을 안 해도 싫어하는 마음, 경멸하는 마음은 피부로 전해지는 모양이다. 특히 후진국에서 후진국 사람들을 무시하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나 보다.
지금은 상호의존의 시대이다. 이제 이기기 위한 외교는 통하지 않는다. 우월이나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외교도 안 통한다. 해박한 지식과 유창한 언변을 뽐내도 상대는 존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계할 따름이다. 이보다는 도가(道家)의 가르침에 나오는 물의 지혜(上善若水)를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바위를 만나도 겨루지 않고 돌아가고, 나아가 상대의 얘기를 듣는 데 주력하는 외교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마음과 마음의 외교, 진심의 외교는 정부 사이의 공식 외교에만 적용될 문제는 아니다. 외국과의 비즈니스에서, 해외거주자의 현지 커뮤니티와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나아가 좁아지는 지구촌의 인간관계 전반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서용현(베네수엘라 주재 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