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 인턴] 사랑하는 나의 불확실성
[사랑하는 나의 불확실성]
이름 : 신현빈
국가 및 지역 : 멕시코 티후아나
기업명 : Sinil Industry
인턴기간 : 6개월
|
[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2018년 여름, 서른을 코앞에 두고 나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아니, 그동안 세워왔던 계획이 모두 실패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당돌하게 시작했던 행정고시에서 4번이나 쓴맛을 보았고, 대외활동이나 인턴/외국어 공부를 포함한 취업 준비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했으며, 다시 일어설 에너지도 충분하지 않았다. 의무감에 몇몇 기업의 취업 설명회를 기웃거리며 입사 지원서도 써 보려고 했지만, 끝까지 작성해서 제출까지 한 기업은 없었다. ‘이 회사에 합격하면 내가 행복할까?’라는 의심을 떨쳐주는 기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뻔하고 진부한 미래를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한상인턴 설명회 포스터를 보게됐다. 해외 취업. 그 네 글자에 처음으로 심장이 반응했다. 해외 근무를 한다면 ‘정해져 있는 길’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늦게 시작한 커리어를 역전 시킬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한국식 위계질서와 부조리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재밌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인 호기심이 연달아 이어졌다. 그때 나는 이미 해외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던 것 같다. 설명회에 참석하면서 그 마음이 굳어졌다. 외국으로 여행이 아닌 ‘일’을 하러 가는 것이었기에 두려움이 있었지만, 영어를 잘 못하지만 현지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적응해나갔다는 전 기수의 경험담 이야기가 특히 도움이 됐다. 어차피 한국 기업이고, 업무 중에는 하는 말만 계속하게 된다고 했다. 해외 생활의 가장 큰 적은 언어와 외로움이라고 생각했기에, 생각보다 언어가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에 더 용기가 났다. 동기 및 후배들이 한창 입사 원서를 써내던 시기, 나는 용감하게도 한상인턴을 지원한 후 더 이상 일자리 알아보기를 그만두었고, 합격의 여부도 알 수 없으면서 ‘다 계획이 있어, 엄마’라고 말했더랬다. |
|
[너나 잘하세요] 나를 사로잡은 것은 불확실성, 그래서 계획 없이 가서 부딪혀보는 게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정이 넘쳐서 주변 사람들을 참 많이 걱정한다. 친절하기도 하지. 멕시코에 갈 거라고 처음으로 지인들에게 말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취직이 확정되는 것도 아닌데 그 나이에 어딜 가느냐, 하필이면 일 년에 수천명씩 총기 사건으로 사망하는 곳으로 가느냐, 언어는 되냐, 그쪽 일은 할 줄아냐. 다들 친절하게도 내 대신 내 걱정을 해준 덕에, 나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가볍게 웃으며 ‘너나 잘하세요’라고 너스레를 떨면 그만이었다. 9월 달에 서류 합격을 한 후, 바로 스페인어 학원을 끊어서 언어를 준비했고, 제 때 출국하기 위해 대학교 졸업 요건들을 하나하나 충족시켜 나갔다. 해외 생활에서는 차가 필수라기에 뒤늦게 운전면허도 취득했고, 현지 감염에 대비해 예방접종도 맞았고,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가며 현지 문화에 대한 공부도 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한명한명 만나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전혀 불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한상인턴 합격 여부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다른 곳에 원서 쓰기를 모두 멈추었던 데다, 합격 후에도 출국 날짜가 바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월에야 정해진 출국 일정도 4~5번 정도 미뤄져 4월이 다 되어서야 출국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행여나 못 가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없을 수는 없었다. 다만 답이 안나오는 걱정을 하는 대신 한국에 있는 시간을 더 즐기고, 못 만난 사람들을 더 만 나고, 부족한 언어공부를 보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시간들이 정말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빠짐없이 보고 와서 아쉬움이 없었고, 짧은 시간이라도 집중적으로 언어공부를 한 덕에 현지 적응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정확한 예정일도 없이 7개월을 기다려야 했지만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미래를 준비했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나의 부서가 ‘생산 관리’로 결정되었던 시기. 그 떄가 내게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다. 기존에 생산부서에 있던 팀원들은 나를 전혀 반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면에 적대감을 드러냈다. 내 책상이 들어서자 팀장을 비롯한 핵심 인원들이 ‘그럼 내 책상을 빼겠다.’ 라며 대놓고 저항에 나섰다. 아무것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고, 어려운 숙제를 내줬으며, 스페인어로 쉼없이 험담을 했다. 극도로 경계하는 시선을 보내거나, 없는 사람 취급을 하거나,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하루하루가 계속 됐다. 일부러 함정에 빠트리는 일도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왕따’라는 걸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먼저 왔던 같은 부서 한국인 차장님은 결국 못 버티고 금세 퇴사하게 되었고, 타부서 한국인 분들은 모두 이사진이었다. 나를 위로해주긴 커녕 ‘빨리 배워서 회사에 이바지하라’, ‘너 그렇게 시간 끌면 못 버틴다’ 등등의 언급을 통해 압박을 넣기에 바빴다. 결국 내 힘으로 극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유를 먼저 찾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밥그릇 챙기기’. 내가 자신들을 대신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적대감을 나타냈던 것이다. 나는 직/간접적인 언급을 통해 그들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돕기 위해서’온 것임을 어필했다. 공존이 가능하도록 나만의 영역을 구축했고, ‘이사진의 친적이다.’라는 거짓 소문에 은근슬쩍 편승하며 나를 ‘잘릴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그들이 가르쳐주는 부분을 빠르게 흡수하고 일에 만전을 기울여 ‘능력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문화에서 존경은 나이나 경험/연차/직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존경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매일 노력했다. 계약은 주 5일 10시간 근무였으나 하루에 14시간, 주 6.5일을 일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유있다’는 인상을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이면 얕보이거나 친해지고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인간적인 접근도 곁들였다. 먹을 것을 선물하고, 웃으며 인사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들어줬다. 힘들 때 위로도 해주고, 얘기할 틈이 생기면 농담을 잊지 않았다. 퇴근 후 어쩌다 같이 어울리자는 초대를 제안을 받으면,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때에도 억지로 어울렸다. 그 결과 부서배치 후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동료들이 웃으며 나를 ‘친구’, ‘가족’, ‘형제’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해오고, 퇴근 후에 같이 놀러가자고도 하고, 주말에 가족 행사에 부르기도 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졌다. 지금은 팀의 중요한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음은 물론이며, 모두와도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처음 위기를 맞을 때만 해도, 해외생활은 비극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낯선 이를 맞은 현지인과 낯선 상황을 맞은 외국인이 빚어낸 한편의 코미디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놀러왔던 날, 멕시코와 한국의 친구들이 모두 모여주었다.) |
|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영화 <타짜>의 등장인물 곽철용은 이동 중 부하가 “올림픽대로가 막힐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마포대교는 무너졌냐?”라고 반문한다. 꽉 막혀있는 앞길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꾸역꾸역 낑겨 살아가던 과거의 나에게 던지는 한마디 같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정해진 길만 걸어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언제나 ‘정도’를 걷기를 요구한다. 한상인턴은 그런 ‘정도’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한국 직장생활과는 진급체계/연봉체계/이직루트/동료관계/선후배및 상사와의 관계/심지어는 사무실 디자인까지 다르다. 게다가 똑같이 한상인턴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나라와 회사마다 그 양상과 뻗어져 있는 길도 가지각색이다. 그 중에는 아우토반 같은 뻥 뚫린 길도 있을 거고, 가시밭길도 있을 거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상인턴이 당신을 ‘다른 길’로 이끌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오늘이 꽉 막힌 길처럼 느껴진다면, 한상인턴이 당신의 마포대교가 되어줄 수 있다. 반대로, 해외 인턴 생활을 하며 꽉 막힌 기분이 든다면 그건 인턴생활이 당신의 올림픽 대로임을 뜻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상인턴이 답이다!”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인생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올바른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올림픽 대로가 막힌다면, 마포대교를 찾아보자. 한상인턴은 불확실성 천지다. 기업도 인턴도 6개월 뒤의 서로의 미래가 어떨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불확실성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한상인턴은 인생의 다음 단계로 건너갈 아주 매력적인 다리 중 하나다. |
(멕시코가 이렇게 즐거운 곳인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