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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V] 열기와 열정을 찾아서

등록일
2019-09-24 00:12:23
조회수
1264

지구청년 프로그램 체험 수기

이름

강태훈

연령대

 

지원 당시 연령대를 기재(초중후반으로 기재)

참여 프로그램

UNV 청년봉사단

활동 기간

2013.10-2014-05, 2018.9-현재

활동 지역

남수단, 라오스

지원 경로

육군 평화유지군 선발계획, 외교부 국제기구인사센터

 

열기와 열정을 찾아서

남수단의 겨울

201310월 나는 이른 초겨울의 쌀쌀함마저 느낄 수 있는 한국 늦가을의 평안함을 뒤로 한 채 최고 기온이 40도를 넘나드는 멀리 낯선 땅 남수단으로 파병 길에 올랐다. 한빛부대는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996호에 따라 창설된 UN 남수단임무단(UNMISS, United Nations Mission in South Sudan) 소속 평화유지군으로 역내 재건 지원을 핵심 임무로 하는 조직이며, 부대는 수도 주바(Juba)에서 북쪽으로 190 km 지점에 위치한 보르(Bor)에 주둔해 있었다. 아프리카 남수단의 이국적 정서가 주는 생경함과 새로운 체험이 주는 기대도 잠시, 척박한 자연환경이 주는 일상의 어려움이 빠르게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우리 부대가 새로이 전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2진이었기 때문에 나와 내 전우들은 남수단의 열악한 생활환경이 앞으로 파병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민캠프

     보르 UN기지 내에 위치한 난민캠프(PoC)를 지원하는 한빛부대

하지만 평화의 확장을 위하여 재건 임무를 투입되었던 애초의 우리 예상과는 달리 부대가 전개한 지 약 2개월 후 남수단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1215일 새벽 부통령 Riek Machar의 실패한 쿠데타로 마무리되는 것 같이 보였던 유혈 사태는 부통령을 따르는 반정부군과 대통령 Salva Kiir를 따르는 정부군 사이 갈등으로 확산되었다. 작은 정치적 갈등으로만 끝날 줄 알았던 사태는 정치적 지도자를 필두로 부족 간의 대립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이틀 후 우리는 한빛부대 생활관에서 총성과 폭발음까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상당 기간 지속된 내전으로 인해 남수단에서는 2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우리가 주둔한 보르는, 수도 주바로 통하는 요충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상당히 격렬한 교전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주요 전장 중 하나였다.

우리 부대원들은 약 2주간 비상시를 대비하여 각기 방탄모, 방탄조끼, 총기, 140여발의 실탄 등 개인전투장구를 상시 휴대했다. 취침 중에도 갑자기 포탄 폭발음이나 총성이 들리면 방탄모와 조끼를 착용한 채 머리맡에 세워두던 총기와 실탄을 들고 방공호로 달려야 했다. 같은 UN기지 내의 네팔부대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4명이 부상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질 정도로 12월은 파병기간 최대 고비였다. 우리 한빛부대원들은 축복을 남수단과 나누어야 하는 크리스마스 기간조차 평온함의 상실과 비인간성의 소용돌이를 걱정하며 신경이 곤두선 채로 보내야만 했다.

보르 UN기지에서만 만7천 명에 달하는 난민을 수용했고 정부군과 반정부군 양측 모두로부터 부상자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또한, 한빛부대가 주둔한 UN기지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면 도로에 널브러져 있는 전사자들과 비열한 전쟁의 상흔을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부상자, 평온함에서 버려진 난민의 물결, 그리고 돌보는 이 하나 없이 하염없이 버려진 주검들은 우리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무서움을 넘어 인간성 말살에 대하여 일깨워줬다. 멀지 않은 지근거리에서 벌어진 전쟁과 살상의 현실이 가져다 준 정신적 충격은 단순한 기억이 아닌 나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이자 동력이 되어 버렸다.

당시 한빛부대는 자체 위성 TV채널을 받아 보았는데 한국 채널은 YTNKBS 두 개였다. 따라서 부대 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 뉴스를 자주 시청할 수 있었고 간혹 한빛부대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남수단 현지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평생 일궈놓은 삶과 행복을 다 잃고 있음에도 한국의 방송에서는 비참한 남수단 무력충돌에 대한 내용은 간단한 뉴스 단신으로만 보여주고 있었다. 방송의 대부분은 크리스마스 기간의 훈훈함과 행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수단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슬픔, 나아가 인간됨의 상실은, 성탄의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에 묻혀 무관심 속의 이야기로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남수단 주민에게 노출된 위험이나 생존문제조차 엄연한 절체절명의 현실임에도 한국인의 현실과 관심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같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대조적인 삶이 공존할 수 있다는 극명한 대비와 현실적 아이러니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전혀 딴판의 천국과 지옥에 견줄 정도의 차이를 살고 있는 동시대 두 집단의 사람들을 보며,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국제개발 분야로 내 지향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차이를 메우는,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작은 징검돌이라도 하나 놓는 일을 하면 의미 있는 삶일 것 같다고 다짐했다.

    환송식

       파병 전 환송식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학업으로 돌아온 나는 공부하던 경제학 학부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국제개발경제학 석사 프로그램으로 진학했다. 나는 평소 평화유지군을 계기로 갖게 된 쉽지 않을 신념과 결심을 실천하고 조금이나마 기여를 할 수 있도록 국제개발 분야의 빈곤 퇴치와 Monitoring & Evaluation 역량을 쌓았다. 석사과정의 졸업이 가깝던 즈음에 UNV 청년봉사단에 지원했고, 이후 약 두 달 후 UNV 본부에서 면접 오퍼 이메일을 받았다. 신나는 마음으로 이메일 링크로 UNV 웹사이트로 들어가 관련 내용을 확인한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결심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어 내가 지원하지 않은 환경 분야의 직위 면접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외교부에서 지원하는 공고가 게시된 30개의 직위 중 한 직위에 대해서만 면접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나는 조바심이 났다. UNV 경험자와 현 UNV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문의했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 받았고, UNV 본부에도 수많은 이메일을 보내봤지만 적절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외교부 국제기구인사센터에 연락을 취했다. 내가 가고 싶은 분야와 그에 대한 내 준비상황을 최대한 설명했고 UNV 본부에 한번 물어봐 준다는 답을 받았었다. 통화가 이루어진지 정확히 하루 후, UNV 웹사이트에 내 인터뷰 오퍼는 지원하지 않은 포지션에서 지원한 포지션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원조국으로서 UNV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와 관련해 국제기구인사센터 직원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남수단 평화유지군 시절부터 UN 상주조정관(Resident Coordinator, 이하 RC)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UN 상주조정관사무소(Resident Coordinator Office, 이하 RCO)와의 인터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약 일주일 후 Monitoring & Evaluation Officer 직위의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원래 파견의 시작은 독일 본에서 진행되는 임무준비교육 (APT) 이후인 11월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7월 라오스에서 남부 아타프 주 사남사이 지역에 위치한 댐이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우리 사무실의 재난 업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내 근무는 9월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라오스
    아타프댐 붕괴 사고로 침수된 집과 이재민

라오스의 겨울

7월 태풍 손띤과 태풍 베빈카로 인해 기록적인 폭우가 라오스를 덮쳤다. 이로 인해 라오스의 많은 지역에서 홍수 피해가 발생했고 아타프 주에서 일어난 댐 붕괴 사고와 더불어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는 97일에 라오스에 도착해 곧장 우리 사무실의 재난 대응과 복구 활동 업무에 참여했다.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UNRCOUN 국가 사무소의 수장격인 UN RC의 업무를 다방면에서 지원하는 사무소이다. UNRCO의 주된 임무는 라오스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18개의 UN기구들과 아시아 지역 사무소에서 라오스를 관리하는 5개의 Non-resident UN기구들의 전반적인 협업과 조율을 관장하는 역할이다. UN기구들 간의 합동 업무와 정보 공유를 통해 라오스 내에 활동 중인 23개의 UN기구들의 업무 중복을 방지하고, 긴밀한 협력을 통해 UN기구들 사이에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한다. 댐 붕괴 사건과 같은 재난 시기가 아닌 평시에도 UNCG, RG, OMT 미팅을 주선해 UN기구들 간 정보 교환을 원활하게 하고 UNDAF, Progress Reports, VNR, BOS 같은 UN 공동으로 발행하는 문서를 작성한다. 기구별 새로운 활동을 긴급하게 시작해야 했던 재난 상황의 라오스에서는 UN기구들 사이에서 협력에 필요한 소통과 조율을 책임지는 RCO의 역할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9월에 도착한 후 나에게 부여된 첫 번째 업무는 재난대응 Cluster를 주도하는 UN기구들로부터 활동과 상황에 대한 자료들을 취합해 Information BulletinHumanitarian Response Plan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재난대응 Cluster는 총 8개로 교육, 긴급복구, 식량안보/영양, 보건, 군수, /위생, 보호, 주거지/대피소 관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UNICEF, UNDP, FAO, WFP, WHO, UNFPA, IOM, UN-Habitat이 주도했다. Cluster는 주기적으로 RCO에 활동과 모금 상황을 보고했고 우리 사무실은 이 정보를 취합해 United Nations 이름 아래 문서를 생산하고 배포했다.

나는 RCO에서 근무하면서 현장에서 UN 지원금의 부족과 그 심각함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국적 차관 기관들과 원조 제공 국가들 그리고 Central Emergency Response Fund(CERF)를 포함한 각종 UN 펀드로부터 재난대응기금을 모았지만, UN 재난대응 활동에 필요한 재정 추정치 미화 4270만 달러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한 800만 달러 밖에 모금하지 못하였다.

재난 대응(Disaster Response) 단계에서 재난 복구(Disaster Recovery) 단계로 접어든 현시점에서는 재정 부족은 더 커졌다. 라오스 정부와 UN, World Bank, EU의 주도로 재난 전문가들이 피해지역에 대해 Post-Disaster Needs Assessment (PDNA)를 실시했고, 그 결과가 11월에 발표되었다. 라오스 재난 복구에 필요한 재정은 미화 52천 달러이며, 현재까지 이 중 상당한 부분에 대하여 아직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대규모 재원이 라오스 GDP3%이고, 라오스 정부 1년 예산의 14%에 달하는 금액이기 때문에, 오롯이 라오스 정부가 부담하기 힘든 규모이다. 뿐만 아니라 라오스가 최근 최빈개도국(LDC)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에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고 중국 정부와 협업해서 건설 중인 Lao-China Railway에 필요한 출자금 때문에 재난 복구에 필요한 돈을 조달하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앞서 강조하였다시피, 당사자가 아닌 다른 나라, 특히 발전된 풍요로운 나라의 사람들이 재난과 전쟁,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경험하는 고통과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라오스에는 이번 홍수로 24백여 개의 마을이 피해를 입었고 616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일부 마을은 홍수로 인해 집과 학교가 무너지고 농지가 흙더미로 덮이고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파손됨에 따라 일상의 삶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으로 도움이 절실하지만 수천km 떨어진 여유 있는 국가의 공동체에게까지 그 고통이 전달되는 데는 역부족이다. RCO에서 각기 다른 우주에 있는 듯이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하고 있는 두 세계 사이에서 정보의 교량을 만들고 서로에 대한 인식의 격차를 좁혀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목표이자 건설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현장과 직결하여 할 수 있는 작지만 현실적인 기여를 통해 한국을 비롯한 원조 제공 국가들과 다국적 차관 기관들이 라오스의 재난 피해 상황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라오스 복구를 위한 노력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하는 게 내 개인적인 바램이다.

  라오스

    라오스 UN 하우스 앞에서

UN의 겨울

많은 이들이 UN에서 정규직(P, NO, G레벨)을 목표로 일을 하지만, 정규직을 구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UN 통계에 따르면 국제 정규직으로 분류되는 P레벨의 말단 직급인 P2급의 85%30살 이상이고 그 중 절반 정도가 35살 이상이다. 부연하자면 정규직으로 일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UN에 들어와 다년간 임시직(컨설턴트와 정부 지원 프로그램)에서 우선 경력과 직무역량을 쌓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개발에 뛰어드는 열정적인 사람들조차 사무실 재정 상태나 현지 근무환경의 열악함 등 어려운 현실에 막혀 다른 길을 모색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UN의 인턴 직급이나 아주 짧은 컨설턴트 직위로 시작하는 반면에, 한국 사람은 3개의 UNV 프로그램과 KMCO, JPO, KIDV 등 많은 프로그램을 국가로부터 지원 받는다. UN에서의 직접적인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만으로 판단할 때 한국으로부터의 지원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큰 셈이다. 국제 NGO를 비롯해 국제개발 분야의 다른 기관에서 일하던 인력이 많이 UN의 직종으로 이직하기도 하지만, 한국 사람은 그래도 나름 유리한 조건이 부여되는 것은 틀림없다.

앞서 언급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UN에서 일하는 경우 일반적인 인턴보다 더 큰 책임과 업무가 뒤따르고 사무실 재정의 걱정이 없이 해당 기구에서 전문성과 필요한 직무역량을 비교적 수월하게 쌓을 수 있다. 하지만 UN에서 정규직으로 어렵사리 진급하더라도 그 정규직의 안정성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UN시스템 내에 있는 정규직 직원들도 지속적으로 재계약이 필요하며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내 주변에는 15년간 일한 P급 직원도 내년에 어디로 가야하는지 고민하고 있고, 계약과 계약 사이에 1년 정도의 공백을 갖는 UN 직원 역시 매우 흔하다.

이런 전후의 사정을 고려할 때 국제기구에 취업을 생각하고 있다면 취업의 안정성을 목표로 할 게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직무와 관련한 지식과 업무 추진역량 묵묵히 쌓아가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앞서 지적한바와 같이 UNV만 되더라도 어느 정도 기관 내에 중요한 업무가 주어지기 때문에, 전문지식뿐만 아니라 외국기업의 업무처리 방식 등 국제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며 내 개인적인 소양이나 업무역량을 조금씩 확장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조바심을 갖지 않고 국제적 무대에서 나에게 주어진 기회가 미래의 내 안정성에 이바지하는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믿음과 성실함이 있으면 된다. 내가 향후 10, 20년 오랜 기간 동안 일할 분야에서 그 정도의 노력은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일 것이고, 이를 통해 분야에서 어느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전문가로 거듭난다면 직장의 안전성을 넘어 내 비전에 부합하는 성취는 자동적으로 따라올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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