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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Job& - 해외봉사단편(1)] 박준우 UNDP DR 콩고사무소 정책관 인터뷰

등록일
2019-10-08 20:10:19
조회수
1866

외교부에서는 외교부와 산하기관의 청년 해외진출지원 사업, '지구청년'을 통해 해외 활동을 성공적으로 펼치고 있는 선배들의 경험담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보다 많은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수 있도록 '지구청년' 기사 시리즈를 마련하였습니다.


각각의 기사는 아래와 같이 지구청년 홈페이지 및 네이버 JOB&을 통해 순차적으로 게재될 예정입니다.


1편 : KOICA 해외봉사단 유경험자

2편 : 국제기구 진출 지원 사업 유경험자

3편 : 해외인턴십 지원 사업 유경험자


그 첫편으로 KOICA 해외봉사단 유경험자, 박준우 정책관, 엄소희 대표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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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KOICA 해외봉사단으로 활동했던 박준우 현 UNDP DR콩고사무소 정책관의 인터뷰입니다.



박준우 UNDP DR 콩고사무고 정책관 동영상 인터뷰는 KOICA 해외봉사단 유튜브 채널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https://youtu.be/1VdMvHE1bwE


박준우 UNDP DR 콩고사무소 정책관 인터뷰*


*동 인터뷰는 외교부 서포터스 14기로 활동한 김서영 서포터가 서면인터뷰로 진행


박준우 UNDP 정책관님, 안녕하세요! 저는 외교부 서포터스 14기 김서영입니다. 저도 국제기구 취업을 목표로 열정을 불태우는 청년들 중 한 명으로서, 박준우 담당관님을 인터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취재하고 작성할 이 기사는 해외진출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 외교부와 산하기관에서 지원하는 청년 해외진출지원 사업(지구청년)에 대해 알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 경험을 쌓고 해외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이번에 외교부에서 지구청년 프로그램을 이미 경험하신 분들의 경험담과 교훈을 청년들과 나누고 이를 널리 알려 해외 진출을 꿈꾸는 여러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번 기사를 기획하였고 제게 정책관님을 인터뷰하여 기사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소개 :  간단하게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UNDP 국가사무소에서 평화정착, 거버넌스, 사회경제개발 등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박준우라고 합니다. 현재 평화정착 및 정부역량강화 프로그램인 슷로 취약국으로 선언(self-declared)한 국가들(g7+)의 맞춤형 개발 계획 및 이행 툴인 뉴딜(New Deal for Engagement in Fragile States)’이라는 사업과 젠더기반폭력 사업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진1. DR콩고 북동부지역 평화정착을 위한 KOICA-UNDP 협력사업 모니터링 방문 중에 팀동료 알린씨와 함께!



질문 1. 현재 UNDP DR 콩고 사무소 정책관으로 일하고 계시는 데 UNDP가 어떤 국제기구이며 그 안에서 어떤 업무를 맡고 계신가요?

각 국제기구는 전세계적 이슈 중 각 분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하는데, 제가 일하고 있는 유엔개발계획(UNDP,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은 그 중 개발 및 인도적-개발 전환 부분에 초점을 두어 일하는 국제기구입니다. 전 세계 170여 국가에서 특히 거버넌스 및 지속가능한 평화, 사회경제적 발전 그리고 기후변화 등의 전략분야를 중심으로 일하고 있고, 제가 있는 콩고민주공화국 국가사무소에서도 동 분야별 팀으로 나누어 약 200여명의 직원들이 정부와 함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수준에서는 전통적으로 유엔기구들의 총괄 조정역할을 담당하여 각 분야 전문 유엔기구들간 조화로운 국가수준활동을 지원하기도 하고요.


 

질문 2. 지구청년 프로그램들은 해외진출을 꿈꾸는 많은 청년들에게 매우 유용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정책관님이 참여하셨던 KOICA 봉사단도 지구청년 프로그램 중 하나이고요. 정책관님께서 특별히 KOICA 봉사단을 통해 개발협력 분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봉사활동을 하셨나요?

개발협력 분야에 일하고 싶은 마음으로 첫걸음으로 무엇이 좋을까 파견 2-3년전 부터 생각하고 봉사단으로 다녀오신 선배들로부터 자문을 구하다가, 장기적 인생방향을 위해 먼저 현장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으로 KOICA봉사단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식량안보에 관심을 가지고 농촌개발 분야로 파라과이의 중소도시 으브꾸이라는 곳에 파견되어 지역농민들과 활동을 했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두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추후 개발협력 분야에서 경험하게 될 것들을 2년간 현장에서 실제 피부로 느끼며 대부분 경험해 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바탕으로 유엔에서 일하는 지금도 그때 현장에서 몸으로 배웠던 일들로부터 인사이트를 많이 얻고 있다는 점,

둘째, KOICA가 오랜 봉사단 프로그램 경험을 바탕으로 봉사단원의 활동을 탄탄하게 지원했고, 이를 통해 안전하게 사업들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현지분들과 살며 개발 수요를 직접 파악하고, 함께 지역주민들과 함께 논의하고, 필요에 따라 사업을 계획, 예산확보, 집행, 평가 등의 일체의 활동을 대부분 직접 해볼 수 있었고, 이를 위해 KOICA가 파견봉사단원의 건강 및 안전을 위한 국제 SOS 등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았을 뿐 아니라, 위 계획한 사업들을 실제 기획 이행해 볼 수 있도록 다른 국가들의 봉사단 프로그램 보다도 더 훌륭했던 봉사단원 현장사업지원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 3. 더불어 지원을 고민하고 결정한 시기에 봉사단 사업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다가왔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국제기구 진출을 목표로 하셨다면 다른 사업들도 있었을 텐데 특별히 봉사단 활동으로 시작하신 이유가 있었나요?(예를 들어, 봉사단의 사업 내용, 기참가자들의 후기, 봉사단 활동 종료 후 지급되는 국내정착지원금, 석사유학 지원 등)

장점이라면 위에서 두가지 설명드린걸로 먼저 대체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당시 국제협력봉사단이라는 현재는 종료된 군복무대체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저에게는 이 부분도 큰 장점 중 하나였고요. 참가 전에는 잘 몰랐으나 위에서도 잠시 언급드린 안전 및 해외건강관련 보험 가입, 봉사단원 현장사업 기회, 석사과정 유학 지원 등이 모두 현장 경험 및 이후 경력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프로그램들이어서 좋았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국제기구진출은 염두에 두고 있진 않았습니다. , 배우며, 장기적인 나의 인생방향에 대해 자유로이 경험하고 성찰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개발협력에 대한 관심은 있었는데, 실제를 경험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를 설계해보자 이런 생각이었어요. 2년 후, 현장의 개발 이슈가 단지 한 분야의 기술적 전문성으로만 해결될 수 있수 없는 다층적 문제임을 알고 이를 이야기 하는 곳에 가서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영국에서 빈곤과 개발 전공으로 개발학 석사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이렇게 이 분야에 점점 깊숙히 들어오게 된 것 같습니다 


질문 4. 또한 선택의 순간에 가장 우려하셨던 점도 궁금합니다!(예를 들어 해외생활, 봉사단 이후의 미래 등)

안전과 건강부분이었 던 것 같습니다. 개도국의 경우 뎅기(dengue), 말라리아 및 수인성 질병 등 건강 문제 뿐 아니라 치안이 불안정하고 도로 및 대중교통 차량 등이 노후하여 이러한 부분들이 다 위험요소로 작용하게 되는데요, 위에서 언급한대로 코이카 봉사단원의 경우 안전 및 건강 관련 예방체계가 철저한 편이고, 대응체계 또한 국제SOS보험 등 국제 최고수준으로 되어 있어 실제 제가 활동할 당시에도 안정감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곳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활동하면서도 몇차례 말라리아에 걸려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요, 이 부분은 개발협력 분야에 종사하게 되면 끊임없이 따라오게 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는 만큼, 위험에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지역 정보를 수집하고 예방하고 또 적응하는 역량도 점점 커지게 되어 그 내공을 바탕으로 업무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질문 5. 코이카 경력사다리 프로그램에 충실하게 참여하시고 결국 현재 UNDP 진출까지 이루신 점이 매우 인상깊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셨고, 이러한 경험이 UNDP 직원이 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봉사단 등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된 역량이 실제 업무로 연계되었는지, 체감상 어느 정도였는지 포함해서요.)

봉사단 이후, 개발학 석사 때 봉사단원 경력으로 학비 일부에 대해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이후 현재는 종료된 ODA전문가 제도로 코이카 콩고민주공화국 사무소에서 근무했었고요. 이후 에티오피아에서 NGO 사업, 그리고 다시 콩고민주공화국 UNDP에서 KMCO 프로그램으로 활동할 기회를 얻었고, 이후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봉사단원 당시, ODA전문가나 KMCO 프로그램이 있진 않았었고 있었어도 제가 미리 그 프로그램에 들어갈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하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제가 경력을 점점 이어가면서 코이카에서도 좋은 프로그램들이 지속적으로 기획되고 발전되었고, 제가 그 수혜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주민들과 안전하게 함께 살 기회, 더 공부해 볼 수 있는 기회, 코이카 사업을 기획해 보고 실행해 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유엔 내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 등이 하나하나 모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질문 6. 해당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시기 동안 겪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해주세요! (예를 들어, 인생의 터닝포인트/설정하신 진로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 사건/일화/사람, 봉사활동시 문화 차이, 해외 생활의 고충, 금전적 어려움 등 봉사 외적인 고충도 괜찮습니다.)

세가지 에피소드 글을 공유드리고 싶습니다. 봉사단원 할 때 당시 적었두었던 글인데 하나는 파견후 얼마 안되어 마을 주민들과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문화적 차이와 개발의 지속성 등으로 고민했던 일, 두번째는 현장사업을 마무리하며 적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봉사단원 활동이 마무리될 즈음 다음 진로로 개발학 석사를 결정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하나. 양파 프로젝트, 첫 결실, Santa Isabel 여성농민공동체 / 파라과이 으브꾸이, 2010.12.2 /사진2(첨부파일 별첨)




선배단원이 시작해 놓고 양파, 수박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이제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다. 이제 이곳에 온지 6개월이 지난 상태. 외국인으로서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 것만 해도 여간 어려운 아닌데, 단원이 단원활동 2년을 마무리하며 진행하고 프로젝트를 적응을 마쳐가고 있는 신임단원이 이어가려니, 만만치 않다.


계약조건을 약간(?) 어기고(물론 우리측도 많이 어겼다. 처음 이니깐!) 먼저 양파를 팔아버린 Minas Cue Santa Isabel 여성농민공동체에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계획대로라면, 함께 중개상인에게 판매를 하고 판매액의 20% 봉사단원인 내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수확할 때는 되고, 판매 지원을 하기로  책임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먼저 팔아버린 것일 게다. 물론 판매를 지원할 농민공동체가 농민공동체만이 아니니프로젝트를 진행중인 4 농민공동체의 전체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2주전 가격 결정 상업화를 위한 농민공동체 대표 2인들과 모여 진행한 회의를 비롯하여 다른 공동체들은 이제 수확할 준비를 하고 있다. 


농촌지도소장 네스똘은 양파 재배 경험이 많아,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그에게 많이 의지를 해온 터이다. 따라서 이번 미나꾸에에서 20% 돌려받기 위해 그와 논의를 먼저 했었다. 대충 금액도 계산하고 말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종자 1kg 10 정도의 양파를 생산할 있고, 현재 시장 가격에 따라 900Gs/kg 받을 있다면, 판매액이 9백만 과라니로 계산이 떨어진다. 미나꾸에의 산따이사벨 여성농민공동체의 경우, 2.25kg 종자를 처음에 받아 생산을 시작했으므로, 양파 22.5톤의 생산이 가능했을 터이고, 225 과라니의 판매액을 얻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농민공동체의 생산량은 1.4, 750Gs/kg, 따라서 15만원의 수익을 내었다고 했다. 계약서 상의 의무사항인 판매증명 영수증 등의 문서등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돌려받을 20% 금액은 21 과라니. 2.25kg 종자값만해도 81 과라니인데, 종자값도 안나오는 프로젝트가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겉보기에 그런 뿐일 것이다. 속은, 분들이 재배한 10kg 짜리 수박 처럼 아주 익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선, 으브꾸이 대다수 소농들의 소득향상을 위한 접촉 프로젝트를 그래도 마무리 지을 있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주어야 한다. 항상 들어온 이야기 중에 하나가, 파라과이 사람들은 돈을 벌어도 계속 이어나가지 못해 가난을 되풀이 밖에 없다. 과라니 족의 문화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수확해서 돈을 날은, 빠짐없이 아사도 파티를 해서 대부분의 돈을 써버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듬해에 지을 농사를 위한 종자를 돈이 없고, 기타 농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돈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차 질문을 하곤 했다. 지금도 사실 이해가 된다. 아니, 하루이틀 농사지은 사람들도 아니고, 10, 20년을 농사지어 사람들이 이듬해를 위한 종자가 없어서 농사를 못짓는다는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하는 것이다. , 지원을 받아내기 위한 꿍꿍이가 있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는 맞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를 하기에, 그리고 나도 수차례 농민공동체들을 방문하고 돌아보고 이야기해보니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어쨋든, 그래서 시작한 프로젝트종자 농자재 구입을 위한 20% 수익금을 돌려받는 전제로 종자를 먼저 사주고 기타 기술지도를 주기로 이상적인 모델을 여러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일단락 지었다는데 의의가 크다. 문제점들은 이제 보완해 가면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실제 1400kg 생산해서 백만 과라니 정도를 판매액으로 얻었는지 알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분들의 말을 믿기로 하고, 종자값도 안나오는 20% 적은 금액이지만 마중물로써의 가치로 본다면 가치는 실로 굉장한 것이기에 여기에 의의가 있다고 있다.


종전의 세계 NGO단체들 UN 관련 기관들의 국제협력 지원 방법이었던 일방적인 지원 , 사후관리는 전무한 형태는 개발도상국들의 삶의 향상에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더이상 인프라 지원 형태보다는 기술을 가르치거나 인재를 양성하는 등의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을 지원하는 형태의 사업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양파 수박사업은 일방적인 지원사업 형태가 아닌, 상호간 기술 공유 공동으로 예산을 집행하여, 그들이 직접 예산을 지불하고, 예산에 덧붙여진 지원 등으로 사업을 추진해 시도이기에, 이에 의미가 있는 사업이라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아직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기분 좋은 상쾌함을 만끽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농민 공동체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 여성들이기에 집안 일도 해야하고, 아이들도 돌보아야하고, 남편들의 밭일을 돕기도 해야하는 상황에서, 본인들의 , 그것도 이번사업처럼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진행함에 있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토로할 때마다, 나는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그리고 맞장구를 드렸다. 나도 많이 공감한다고. 많이 힘드셨을 같다고 말이다. 직접 재배하신 수박을 쪼개며 농민공동체장 아주머니가 보고 아들, 아들 하셨다. 기분이 좋았다. 코도 눈도, 피부색도 다른 나를 아들이라 불러주셔서, 나도 그분들과 일원이 같은 느낌에 이렇게 땅이지만 따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같이 사업을 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먼저 가족으로 생각해주신다는 생각에 풋내기의 이런 저런 노력을 따듯하게 받아주신다는 느낌에 마음이 풍성해짐을 느꼈다.

글로 담아낼 없는 풍족함이 가득 차오른 하루였다.


다른 농민공동체들과의 일들이 아직 남아 있다.


배우며, 시도해보며, 성장하자.

이야기 둘. 현장사업을 일단락지으며 / 파라과이 으브꾸이, 2011.10.19 /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다.


이래로 두주가 지난 이제서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원래의 속도를 다시 찾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같다.

2011 921 - 30.


MBC 코이카 합작으로 기획된 "코이카의 " 봉사단원 촬영팀 80여 명이 이곳 파라과이 으브꾸이에 다녀갔다. 으브꾸이에 코이카단원이 파견된 이래, 아니 으브꾸이 역사상 다녀갔을 모든 한국인 수를 합쳐도 그에 못미칠만큼 큰 규모의 인원이 그것도 열흘안에 세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떠났으니, 비단 뿐만 아니라, 으브꾸이 마을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현장사업과 병행하여 진행된 사업은, 사업시행 한달 전에 사업이 결정되고 준비가 시작된 일이라, 처음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미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코이카 단원의 개도국 지원사업에 일반인들이 봉사단원으로 참여하여 함께 사업을 일궈내는 과정을 담아내는 프로젝트로 취지는 너무 멋지고 앞으로 계속되어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행정적 처리 물품 구매 외적인 사전준비를 위한 시간으로 한달 반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사실 가장 마음조리며 준비해야했던 것은 사업을 위해, 현지사람들과 사전에 사업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일정 구체적인 사항들을 조율해나가는 등의 소통을 계속 이어가는 일들이었다.


 " 열악하구나, 집도 그렇고, 마시는 물도 그렇고, 버스 의자는 이렇게 온전한게 없고 더러운 걸까" 파라과이에 처음 도착했을 느낀 바이다. 아직 사회 깊숙한 곳으로의 걸음을 떼기 전에, 마냥 겉에서 보고 생각들이다. 신기한 것은 1 반정도가 지난 지금, 기관에서 현지인 동료들과 일을 하며, 현지인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는, 드는 생각이 다르다. "아무리 시골의 가난한 지역이라도, 굶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뚱뚱한 사람들이 많은, 그리고 삶을 즐길 아는 남미의 빈국, 파라과이에, 과연 이방에서 봉사단원이 필요한 것일까?", "한국정부지원의 프로젝트를 통해 이곳에 지원하려고 하는 여러 첨단시설과 기구들이 이미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과연 필요할까?", "봉사단원으로 이곳에 농업기술을 전수하고자 나는, 오히려 삶이란 어떤 것인가, 어떤 삶인가? 하는 삶의 기술을 오히려 전수받고자 것은 아닌가?"


다시말해, 한국이 (경제적기준으로 ) 살고, 좋은 기술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정신적 풍요로운 삶의 기준으로 ) 살고 있는 나라에, 신식 최첨단 건물 하나 지어주고 박수 받고 돌아가는 실례를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해, 사전에 농민들과 회의를 여러차례 진행하며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어떤 부분이 지원이 것이며, 이곳 시골마을에 오는 지원에 감사하고 이에 본인들이 있는 것으로 함께 사업에 참여하고자 언제 어떤 부분에서 함께 참여를 있을 것인가에 대해 여러차례 회의를 열어 논의를 해야했다. 그랬기에 비가 오면 농민회의가 일주일씩 연기되는 것이 일반적인 이곳에서 2개월 안에 소통을 충분히 일구어내는 자체가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이곳에 도착한 봉사단원들 촬영팀이 이곳 상황을 알리 전무하고,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현지 봉사단원인 내가 사업의 수혜자인 농민 측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해야했다. 이것은 사업계획서에도 없고, 사업 일정 중에 진행을 위해 열린 여러차례의 회의에서도 중요성 만큼이나 비중있게 다뤄지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솔직히 많이 버거운 일이 아닐 없었다.


한국에서는 전화가 어디서나 되니, 이미 약속한 내용을 1시간 전에 바꾸어도 전달이 되고, 충분히 바뀐 내용대로 진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에선 전화가 없는 농민들이 많고, 전화가 있어도 시골지역에 안테나가 터지니, 보통 한주전에 공지해야 여유롭고, 최소 하루 전에 전달된 내용이어야 이웃들에게 발소식(직접 집에 걸어가서 전해주는 소식) 통해 전달하여 다음날 그대로 진행이 가능하다. 우선 사전에 농민들에게, 함께 진행하는 사업이지만 한국에서 팀의 사정으로 여러차례 일정 등이 변경될 있음에 대해 양해를 구해놓았음에도, 변경되는 일정들을 일일이 전달하려고 하니,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에 주거 비닐하우스 완공식을 진행하면서, 농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사업에 가장 열심히 참여한 사람에게 우수농민상을 수여하기로 하였는데, 전화가 없는 농민은 전날 갑자기 변경된 일정을 전달받지 못해, 식이 끝나고 팀이 서둘러 다른 일정을 위해 마을을 나서는 길에서 마주쳐 밖으로 인사를 건네야만 했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코이카 현장사업비로 진행된 사업은, 열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임기 지속될 사업을 바라보며 준비해야 했기에, 가끔 전기가 끊기는 상황을 고려하여 사려고 했던 발전기 2대를 취소하지 않을 없었다. 전기가 끊기면 드릴 등의 전기공구를 사용할 없어 건축이 지연되고 전체일정이 밀리기에 열흘간의 일정만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었지만, 사업비의 10% 넘는 예산을 들여 사기에는, 열흘의 일정 이후 사용도가 거의 없는 물품을 사는 것이 합당치가 않았던 것이다. 어김없이 일정 중에 하루 반나절 전기가 나갔고, 만약을 위해 건축담당자 개인물품으로 가져온 발전기를 주거건축 쪽에서 사용하고, 비닐하우스 쪽은 수동드릴을 사용하는 임시방편으로 일을 진행해 나갔다. 사실, 농민들과 사업을 진행하며 이런 종류의 일이 발생하면, 일을 취소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다음으로 연기하는 나라의 방식이다. 일을 함께 하기로 약속 날짜에 비가 오면, 자연스레 한주가 연기가 된다. 이것이 나라의 속도인 것이다. 처음에 이게 이해가 안되어 혼자 얼마나 속앓이를 했던지 모른다. 전기가 나갔을 , 어서 전기담당자 연락처를 받아서 연락해 보라고 독촉했던 , 그리고 비가 와도 일은 해야한다고 우산에 비옷을 챙겨 혼자 약속장소에 나가 기다리다 지쳐 돌아왔던 일, 이젠 그게 아니란 것을 앎에도, 이번엔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양쪽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율을 해야했기에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발생을 했기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사실 원칙대로, 봉사도 좋고 지원도 좋지만, 현지에 왔으니 먼저 현지의 속도와 방식에 따를 것을 (요청이 아니라) 몇번이고 강요하고 싶었지만, 다수 앞에 용기가 나지 않기도 했고, 사업의 취지대로, 개발도상국 지원의 어떤 실제적인 부분들을 방송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람들이 이해하고 좋은 생각들과 마음들을 모을 있을 것이란 기대를 다시금 마음 속에 품으며 중간 조율자의 역할을 계속해 나갈 힘을 얻곤 하였다.


사업을 마치고 돌아보며 정리하려고 쓰기 시작한 글인데, 죄다 힘들었던 내용으로 채우게 되는 같다.


이곳에 801 경쟁률을 뚫고 지구반대편까지 건너온 20명의 일반봉사단원들. 다들 사회에서 경력도 화려하신 분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비닐하우스 비닐을 덮기위해 서까래를 타고 맨발로 올라가야하는 위험한 작업도, 작업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계시기에 망설임 없이 서로 먼저 올라가겠다고 하는 그분들의 열정과, 본 지 얼마 되지도 않고 말도 통하는 농민들을 대신 감싸안고 눈물로 위로를 전해주신 코이카의 일반봉사단원들에게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모른다. 나보다 연세도 많으시고 경험도 많으신 형님, 누나 그리고 부모님 같으신 분들이, 존칭을 주시며 일에 따라주시고, 땡볕에서 먼저 물을 건네주시던 손을 기억해야 것이다. 한국에서 가져와 전해주신 참치며 , 볶음소고기고추장을 남은 임기 동안 아껴서 먹어야 같다. 현지 가난한 농민들 뿐 아니라, 남아있을 봉사단원인 내게 전해주고 가신 격려와 위로를 앞으로 힘든 순간마다 꺼내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방송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어떤 모양이 되었든, 이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 기회가 닿지 않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잡아줄 힘을 가진 사람들의 한걸음을 도울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 일정이 끝나니, 본래의 속도대로 돌아와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 사업을 기점으로, 남은 임기를 어떻게 보낼지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어떤 사업이든, 이들을 위한 일들을 이들이 나갈 있도록 하기 위해 이젠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일을 꾸며가 생각이다. 시간이 얼마 없다. 2 고향, 파라과이 아자!


이야기 셋. 개발경제학의 눈을 빌려 내 임지와 사업을 재조명하다 / 파라과이 으브꾸이, 2012.1.28 



한달 코이카농장 스테비아회사 동료로부터 방문하는 손님에게 통역을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기 온지 이제 2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나라 언어를 배우는 모든 외국인에게 그렇듯 항상 부담과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기에, 부탁을 받을 때부터 마음 구석이 무거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관 동료의 부탁이기도 하고, 오는 손님이 스웨덴의 개발경제학 석사과정생으로 스테비아 회사(스웨덴 회사) 진행하고 있는 스테비아 생산사업의 취지, 전략, 진행상황 결과 등을, 사업대상인 소규모농민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는 형태로 진행하는데 통역을 요청한 것이라 부담을 뒤로하고 선뜻 요청에 응하게 되었다.


이곳 파라과이 농촌과 소규모농민들의 실상을 1 반정도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느껴오고 있고, 상황에서 진행할 있는 실제적인 지원사업들을 여러모로 시도하고 시행착오들을 바탕으로 현재에도 계속해서 새로 구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때 그때 떠오르는 생각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고, 커다란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한계를 느껴오던 터에, 새로운 눈을 빌려 내가 그동안 발을 딛고 있던 곳을 재조명해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손님이 오기 전부터 괜히 기대가 되었다.


손님이 도착하고, 기관 동료와 함께 으브꾸이 내에서 현재 회사와 계약을 맺고 스테비아 식물을 생산하고 있는 농민공동체들의 소규모농민들을 직접 만나러 나섰다. 파라과이 여름 더위에, 셋이 끼어타야 하는 차량으로, 으브꾸이 시내 아스팔트길을 지나 울퉁불퉁 흙길을 지나 농민들을 방문하는 일은 사실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이곳 파라과이에 와서 시골농민들을 방문하던 일을 생각하노라면, 겨우 시동 걸려 굴러가는 차를 타기 일쑤였고, 배수가 되어 중간 중간 4-50cm 푹푹 패어져 있는 흙길을 지나는 방문여정은 아직 이곳 상황을  몰랐던 나에겐 하나 하나가 두려움 투성이었던 것이다. 농가에 도착해서는 마셔도 되는 물인지 길이 없는 우물 물로 돌려마시는 떼레레를 입에 갖다대기엔 여전히 한국 위생관념에 길들여진 나로선 박테리아, 바이러스, 전염병 너무 많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시간들 속에 이곳 시골 상황을 파악하고, 가난한 소농들의 고질적인 어려움과 해결책들을 고민하던 것도 이제 봉사단원 후반부를 지내며 어느정도 정리가 되어가던 터였다.


농가에 도착하여 떼레레를 마시며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걸까. 이런 황당한 질문들을 하다니 말이다.


"당신이 밭에서 하느라 아이들을 없을 , 농민공동체 등에서 아이들을 대신 봐줄 놀이방같은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


파라과이 시골의 열악한 상황을 아는, 아니 어느정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질문을 듣고서는 나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라 기관동료도, 그리고 농민까지 함께 웃었다황당하기 그지 없는 질문이었다. 답은 그런 프로그램은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듯한 뉘앙스의 대답들이었다어떤 농민과 인터뷰해도 질문에 대한 답은 100% No 였다.


"매달 돈은 얼마를 저금하고 계십니까?"


또다시 ''.


농민들에겐 매달 나오는 월급 같은 개념은 없다. 단지 작물의 수확기가 우리네 월급 날과 같은 것이다.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하던 질문들이기에 처음와서 그러려니 이해는 되었지만, 여전히 어이는 없었다.


"나이가 들어 더이상 밭에서 일을 수가 없는 농민공동체 회원에게, 농민공동체로부터 지원금이 나옵니까?"

나라 80-90% 이상이  나라 농목축산부(정부)에서 무리지어 놓은 농민공동체의 허울을 알고나 하는 소린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 괜히 마음이 뭔가 매어오고 불편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을 다른 지역의 몇몇 농민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지원금이 있다는 것이다. 농민공동체로부터는 아니지만, 정부로부터 지원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생각보다 되는 금액이었기에 정말 놀라지 않을 없었다. 그동안 농민들로부터 하도 들어온 이야기가 정부로부터의 지원이 있어도 이곳 시골지역의 소규모농민들인 본인들에겐 미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기에, 어쩌면  머릿 속에선 이미 가능성을 배제해 놓고 있었던 것일까.

코이카 봉사단원으로서, 특히 개발도상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농업 분야 현장에서 활동하며 종전의 생각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들을 견지하게 되고, 그러면서 이후의 진로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바로 개발학이라고 하는 학문에의 입문이다. 2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무 세상에서 벗어나 숲을 잠시나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잘은 몰라도, 그동안 축적된 개발 경험들을 바탕으로 다시 일반화시켜 놓은 이론들은 시행착오를 줄이는 지름길이 있다는 생각에 매력을 느낀다. 아니 고상하게 말할 것도 없이, 개발도상국에서 이제 더이상 땡볕 더위에 시행착오 한답시고 고생하기 싫은 현재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번 개발경제학도와의 농가방문 인터뷰는 마치 마트 시식코너에서 치킨너겟을 맛본 같은 느낌이 든다. 이론이라고 하는게, 이론의 일반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 있고, 그래서 돼지 앞의 진주와 같은 꼴이 모르겠지만, 현장을 일부 경험하고, 방향을 굵직한 이론에 근거하여 제시할 있도록 학문을 통해 훈련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있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갖게 된다.


농민들에게 던졌던 질문들은 사실 현지인과 내가 함께 느낀  황당함의 정도 만큼이나 시간이 걸리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방향 만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며, 결국 실제 그렇게 기대하기를 놓진 말자.

질문 7. 더불어, 당시에 봉사단/프로그램을 할 때에는 몰랐지만, 현재 업무를 맡으며, “아, 내가 그때 이러이러한 봉사단/프로그램의 특성을 더 이용해볼걸, 아쉽다!” 하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어느 부분이신가요?

현장사업을 실제 기획하고 수행했었는데요. 개발협력이 결국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단 사실을 당시엔 잘 이해하지 못해서, 혼자서 해보려고 했던 부분이 지금 돌아보면 아쉽습니다. 그 사업이 마을단위이든, 시 단위이든 국가 단위이든 결국 여러 행위자(actor)들이 함께 논의하여 합의한 대로 이끌어가야하는데, 그때 당시에는 언어의 한계라는 핑계로 (사실 지금은 언어 등의 한계보다는 전략이 방향을 이끈다고 믿습니다.) 국한된 이해관계자간의 협의를 통해 사업을 이끌었었는데, 다시 같은 맥락에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일 먼저 포괄적 사업협의체를 구성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이후 전략을 함께 짜고 함께 사업을 수행해 나갈 것 같습니다. 코이카 봉사단원 현장사업은 이 부분까지도 다 지원할 수 있는 틀임에도 제가 잘 이용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쉽습니다.


질문 8. 본 기사를 통해 동 봉사단 프로그램 지원을 고민하고 결정할 예비 참가자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전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KOICA 봉사단/경력사다리 프로그램은 _이다.” 혹은 “KOICA 봉사단/경력사다리 프로그램은 _적이다”라고 직관적인 단어를 이용해 표현해 주셔도 됩니다. )

KOICA 봉사단 프로그램은 개발협력 초심자(Beginner)에게 최고의(Best) 프로그램이다.


 

질문 9. 긴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책관님께서 봉사단이 되고자 하는 청년들과 해외 진출을 막연하게나마 꿈꾸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나 앞서 하지 못하신 말씀 중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해 주세요!

개발협력은 반드시 해외의 이슈는 아니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나라의 현 이슈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해외의 개도국 개발협력 현장에서의 경험은, 그 개도국은 물론 다시 우리나라의 개발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일 뿐 아니라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계속 관심이 있는 분이시라면 코이카 봉사단원 프로그램은 단연 최고의 프로그램 중 하나라고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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